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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영화<실미도> 대한민국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

by 오드레인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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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미도

영화 <실미도>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2003년 12월 24일에 개봉한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제4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대상, 제25회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및 감독상,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의 목을 따라

북으로 간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에 걸려 인간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은 뒷골목을 전전하다 살인미수로 수감됩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부 124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했다가 실패한 '1.21 사태'가 일어나자 보복을 위해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 공군 산하 특수부대를 창설하게 됩니다. 강인찬을 비롯한 31명의 사형수, 무기수, 일반 재소자등으로 구성된 이 특수부대는 684부대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으며 이들의 목표는 북한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작전에 성공했을 시 모든 형벌 취소 및 전과기록 말소등 새로운 삶을 보장받는 조건이었습니다. 훈련도중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목숨을 건 지옥훈련을 받는 684부대원들은 단 3개월 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고 부대가 창설한 지 4개월 만에 드디어 침투 명령이 떨어집니다. 작전 성공 후 새로운 삶을 산다는 희망과 각오를 다진 부대원들은 바닷길로 북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갑작스러운 작전취소 명령으로 인해 무산됩니다. 실미도 부대를 창설하고 훈련받는 몇 달의 기간 동안 북한과의 관계가 화해분위기로 바뀌었고 684부대 창설을 주도했던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 급격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후 684 부대는 3년 4개월 동안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하게 됩니다. 모든 상황이 변했습니다. 매끼 흰쌀밥에 백숙, 불고기 등 풍성한 식단을 제공받던 684부대는 더 이상 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보리밥에 감자 쪼가리만 먹는 열악한 배식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교도소 재소자만도 못한 처우를 받습니다. 교육대장은 상부에 차라리 월남에라도 파병 보내달라고 건의하지만 범법자들로 만든 부대를 외부에 알릴 수 없었던 상부는 모두 묵살합니다. 작전을 위해 예리한 칼날처럼 만들어놨던 군기도 시간이 지나며 마치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들처럼 느슨해졌습니다. 결국 대원 2명이 탈영을 해 육지로 나가 민간인 여교사를 강간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1명은 자살, 다른 1명은 자살에 실패하여 체포되어 처벌을 받던 도중 그의 고통을 빨리 끝내주기 위해 강인찬에게 맞아 죽습니다. 어느 날 상부에서 684 부대원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교육대장은 이 사실을 조 중사와 박 중사에게 전달하고 평소에 병사들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조 중사만이 이 명령에 반대합니다. 교육대장은 이 모든 이야기를 강인찬이 몰래 듣게 합니다. 교육대장은 조 중사에게 상부를 설득해 보라는 거짓말로 출장을 보내고 바로 그날 684부대원들의 기습공격이 시작됩니다. 이미 기간병과의 전투력 차이도 있었고 선제공격이 있었기에 단 십여 분 만에 실미도를 장악하게 되고 교육대장은 자결합니다. 특수부대원들은 인천으로 상륙, 송도 외곽에서 시외버스를 탈취했고  청와대로 향하게 됩니다. 라디오에서는 그들을 북한 공비라고 표현했고 부대원들은 분노합니다. 점점 좁혀져 오는 포위 속에 피투성이가 된 부대원들은 본인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버스에 적으며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서로 수류탄을 던져가며 자폭합니다. 현장에 있었던 조 중사는 끝까지 그들은 공비가 아닌 대한민국 특수부대원들이라 소리치지만 자폭을 막을 수 없었고 이 사건은 무장 공비들의 사건이라고 언론에 보도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 사건의 진실은 잊히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실제 사건과의 비교

실제 사건 및 원작의 내용과도 상당 부분 왜곡이 있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684 부대원들의 구성은 대부분 사형수, 무기수등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시골 청년, 운동선수, 서커스단원, 운전기사 등 대부분 평범한 청년들이었다고 합니다. 실제 이들은 적지에 침투한 후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방면의 이력이 있는 사람들로 소집했다고 합니다. 물론 범죄자 출신도 있기는 했지만 중죄인보다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손재주가 있는 소매치기범 정도였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안성기 배우가 맡은 교육대장역은 강인하고 임무에 충실한 참군인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각종 비리를 저지르는 악덕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이중장부를 통해 부대 운영비를 빼돌렸고 최후에 앙심을 품은 훈련병 2명에게 망치로 머리를 가격 당해 사망했습니다. 버스 자폭 이후 실제로는 6명의 생존자가 있었고 그중 2명은 후송 도중 사망. 최종적으로 4명이 살아남았습니다. 군사재판에서 1,2심 모두 사형선고 되었고 1972년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국회 진상조사 당시 생존자 4명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실미도의 억울함을 풀 기회가 있었지만 뜻밖에도 그들은 실미도에 대한 어떠한 말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갑자기 침묵한 이유는 진상 조사 전에 군 관계자가 한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어차피 이대로면 사형을 당한다, 월남으로 보내줄 테니 그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는 군관계자의 말을 믿었던 부대원 4명은 묵비권을 행사했던 것이었고,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군은 사형 집행을 받은 지 70일 후에 그들을 총살합니다. 문제는 그 뒤 어떠한 형식적인 장례절차도 거치지 못하고 암매장되었고 현재도 그들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소설, 영화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온 '실미도 사건'. 영화적인 표현으로 인해 많은 부분들이 각색되어 비판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알 수 있게 된 순기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미도 사건으로부터 50여 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과거 그들의 고통과 억울함의 장소였던 그곳이 이제는 해수욕장이 되었고 유원지가 되었으며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오는 캠핑장이 되었습니다. 장소의 의미는 바뀌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찾지 못한 고인분들의 유해가 조속히 발굴되어 유가족분들의 안녕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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